2012년 겨울, 남자 프로농구 울산 모비스(현 울산 현대모비스) 벤치에 임근배(54) 코치가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임근배 코치는 1999-2000시즌부터 당시 인천 신세기(현 인천 전자랜드) 유재학(58) 감독을 보좌해온 명지도자였다.
유재학 감독이 2004-2005시즌을 앞두고 전자랜드에서 모비스로 이적할 때도 임근배 코치가 함께할 만큼 두 사람은 지금까지도 농구계에서 손꼽히는 ‘감독-코치 조합’의 좋은 사례로 거론된다.
그랬던 임 코치가 시즌 도중에 갑자기 보이지 않게 되자 농구계에서는 ‘미국에 외국인 선수를 보러 간 것이 아니냐’는 말들도 나돌았다. 하지만 당시 임 코치는 암 수술을 받고 투병 중이던 아내 홍제옥(53) 씨를 간호하기 위해 캐나다로 떠난 것이었다.
2년 넘게 캐나다에 머물며 아내 간호와 아이들 뒷바라지, 그리고 작은 사업을 하며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던 그에게 2015년 초 여자프로농구 용인 삼성생명에서 감독 제의를 했다.
임근배 감독은 “여자농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을 때였다”고 회고했지만 결국 감독 제의를 수락했고, 삼성생명 지휘봉을 잡은 지 6년 만인 2020-2021시즌에 드디어 챔피언결정전 정상에 올랐다.
정규리그 4위(14승 16패)로 플레이오프에 턱걸이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1위 아산 우리은행, 챔피언결정전에서는 2위 청주 KB를 연파하며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우승을 차지했다. 국내 남녀프로농구는 물론 웬만한 다른 종목을 통틀어서도 포스트 시즌 사상 최대 이변으로 부를 수 있을 정도의 ‘대반전’이었다.
워낙 예상 밖 결과가 속출하면서 이번 시즌 여자농구는 TV 시청률이나 인터넷상의 지표 등이 예전보다 크게 높아졌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임근배 감독은 우승 후 인터뷰에서 “아내가 큰 수술을 받고도 잘 견뎌줘 고맙고, 캐나다에서 새벽에도 경기를 보며 응원해준 아이들도 큰 힘이 됐다”고 애틋한 가족 사랑을 전했다.
22일 경기도 용인의 삼성생명 휴먼센터에서 만난 임근배 감독 부부는 서로 눈빛만 봐도 통하는 것이 보일 정도로 부부애가 느껴졌다. 두 사람은 “1986년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난 사이”라고 소개했다.
경희대 농구부 신입생으로 경영학과에 입학한 임 감독이 당시 체육과 1학년생이던 홍제옥 씨를 보고 “만나보자”고 한 것이 벌써 35년 전이라는 것이다.
그는 “원래 모비스가 미국 전지 훈련을 해마다 9월에 갔는데 유독 그해에만 8월에 갔다”며 아내의 투병 생활이 시작되던 때를 떠올렸다.
예년처럼 9월에 미국 전지 훈련을 갔더라면 캐나다에서 9월 신학기가 시작된 가족들이 미국으로 오기 어려웠을 테지만 2012년에는 8월 말에 1주일 정도라도 가족들이 함께 지내자는 취지로 미국에서 모였다는 것이다.
그때 평소 안 좋았던 부위의 검사를 병원에서 진행하면서 암이 발견됐고, 그래도 비교적 일찍 발견한 덕에 수술로 치료할 수 있었다.
임 감독은 “다행히 수술도 일찍 받았는데 퇴원 후 돌봐줄 사람이 마땅치 않으니 제가 시즌 도중에 캐나다로 가게 됐다”며 그때부터 2년 3개월 정도 캐나다에서 지냈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 기간이 저에게는 좋은 시간이 됐다”며 “그전에는 가족과 함께 보낼 시간이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그 기간에는 계속 함께 지낼 수 있었고, 코치를 오래 하면서 계속 비워내기만 했던 저 자신도 채울 수 있는 때였다”고 돌아봤다.
임 감독은 캐나다 토론토에서 지내면서 인터넷 카페도 운영했었다고 밝혔다. 그는 “사실 처음에는 말 그대로 ‘카페’인 줄 알고 했는데 가서 보니 우리 식으로 보면 ‘피시방’ 같은 곳이더라”며 “예전에는 컴퓨터라고는 마우스로 클릭만 할 줄 알았지만 그때 컴퓨터 수리도 해보고, 조립도 해보면서 다른 세계도 경험해봤다”고 껄껄 웃었다.
옆에 있던 아내 홍 씨는 “거기서는 정말 사람 한 번 부르면 그게 다 돈이었기 때문에, 컴퓨터 수리나 조립 같은 것을 직접 안 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후 2015년 초에 삼성생명의 제의를 받은 임 감독은 “처음 여자농구 팀을 맡게 됐다고 하니 주위에서 여러 조언을 해주시는데 안 좋은 얘기들이 많았다”며 “그래서 제가 한번 바꿔봐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다”고 여자농구에 입문하던 때를 떠올렸다.
임 감독이 이번에 우승을 차지한 뒤 선수들과 함께 한 ‘큰절 세리머니’는 바로 그런 임 감독의 ‘초심’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는 “저도 학교 다닐 때 거의 맞아본 적이 없었는데 선수들에게도 내 감정으로 대하지 말자고 다짐했다”며 “감독이나 선배가 예우해주면 선수나 후배들도 그걸 고맙게 생각하고 잘 따라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서로 얘기를 통해 잘 맞았던 것 같다”고 선수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또 전했다.
다만 “어떤 스타일이 맞는 거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며 “다 감독마다 스타일이 있고, 팀의 상황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어떤 지도 방법이 맞는다고 하는 것은 제가 감히 할 수 없는 이야기”라고 덧붙였다.
‘큰절 세리머니’에 대해서는 “선수들이 저를 헹가래 치기 무거울 것 같아서 그렇게 한 것”이라면서도 “나중에 사진 기자님들 요청으로 헹가래를 받기는 했다”고 전했다.
아내 홍제옥 씨에 따르면 이런 임 감독의 스타일은 타고난 것 같았다. 홍제옥 씨는 “워낙 말이 없이 과묵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 나쁜 이야기를 안 한다”며 “제가 속상해서 좀 이야기를 해도 편도 잘 안 들어준다”고 ‘험담 같기도 한 칭찬’을 했다.
“성적이 안 나올 때 힘들어하지만 그럴 때도 혼자 삭히는 스타일”이라며 “제가 먼저 물어보면 그때 몇 마디 하는 정도”라고 ‘남편 임근배’의 매력을 소개했다.
사실 임 감독은 2019-2020시즌은 6개 구단 중 최하위에 그친데다 계약 기간도 만료가 되며 지도자 생활에 위기였다.
그는 “사실 책임지고 그만두겠다는 생각도 했었다”고 털어놓으며 “그래도 구단에서 기회를 주셔서 이렇게 자존심을 되찾을 수 있게 돼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람 좋은 외모에 푸근한 인상이지만 ‘승부사’답게 독한 면도 있다. 즐기던 술도 2005년에 끊었고, 당시 코치를 맡고 있던 팀이 2007-2008시즌 하위권으로 떨어지면서 잠깐 다시 술을 입에 댔다가 다시 2008년 이후 10년 넘게 금주 중이다.
임 감독은 “2005년에 유재학 감독님하고 너무 우승하고 싶어서 혼자 교회에 가다가 결심했다”며 “우승을 하고 싶다고 기도하다가 ‘그럼 나는 술을 끊겠다’는 다짐을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교회를 다녀와서 유재학 감독님께 ‘저, 이제 술을 끊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이해는 해주시면서도 ‘아니 어제까지 술 같이 잘 먹다가 왜…’하는 표정이시더라”고도 말했다.
이후 구단 행사 등에서 ‘높은 분’들이 주는 술잔도 마다하며 ‘술 안 먹는 사람’으로 거듭났고, 임 감독은 “국내 현실이 그런 술자리에서 코치들이 할 역할도 있는 것이 사실인데 유재학 감독님께서 많이 이해해주셨다”고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선수 때 현대에서 우승을 경험했고, 은퇴 후 현대에서 한 번, 모비스에서 세 차례 정상에 올랐던 그는 감독으로는 이번에 처음 우승 반지를 맞추게 됐다.
임 감독은 “물론 선수나 코치 때 우승도 좋았지만 감독이 돼서 하는 우승은 느낌이 살짝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우승 인터뷰 때도 얘기했던 ‘1인 1기’에 대한 말들을 3년 전부터 계속해왔지만 그래도 우승하고 얘기하니까 조금이라도 더 들어주시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
임 감독은 “청소년들이 각자 운동을 하나씩 하게 되면 청소년 문제도 줄어들고, 건강보험 재정에도 도움이 된다”며 “또 일자리 창출도 가능해지고 인내심과 협동, 끈기, 배려와 같은 인성에도 좋은 영향을 준다”고 강조했다.
그는 “제가 처음 여자농구 와서 보니 고등학교 팀에 5∼6명이 전부인 것을 보고 이러다 10년 지나면 여자농구는 없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며 “법으로 청소년들이 스포츠 하나씩 꼭 하도록 강제해야 한국 체육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스포츠와 우리 사회의 미래도 밝아진다”고 역설했다.
‘과묵함이 매력’이라는 임 감독이지만 한국 스포츠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물을 한 통 다 비워가며 앞으로의 걱정과 해결 방안 등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임 감독은 우승 후 일정 등이 정리되면 아내 홍제옥 씨와 함께 캐나다에 있는 아들, 딸을 만나러 출국할 예정이다. 그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2년이나 못 만났다”고 가족 상봉을 기대했다.